도스토예프스키의 불멸의 걸작 '죄와 벌'은 범죄를 저지른 인간의 내면적 고뇌와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라스콜니코프라는 이중적 인격의 주인공은 소냐와 스비드리가일로프라는 대조적인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분열된 본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 소설이 아닌, 인간 본성의 양면성과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 탐구입니다.

소냐와 라스콜니코프: 이중 인격의 대립과 공존
라스콜니코프는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니코프가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상반된 두 가지 면모를 각각 나타내는 두 명의 추가 인물을 창조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의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동정심 많고 자비로운 면모를, 온순하고 순종적인 면모를 나타냅니다. 그녀는 '모든 인류의 고통'을 상징하는 인물이 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 의지와 권력, 지성을 냉정하고 무심하게 드러낸 인물입니다. 따라서 소설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에게 매료될 때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타락함에 혐오감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스비드리가일로프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를 만나러 갈 때면 소냐의 눈물과 나약함에 역겨움과 혐오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동기가 어떠하건 살인이라는 범죄입니다. 그가 아무리 선량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나쁜 인물 1명을 살인했다손 치더라도, 살인이라는 범죄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라스콜니코프에게 그런 권한이 있었을까요? 권한이 있는 것은 오직 자연뿐입니다. 자연 앞에 인간은 아무 권한도 없으며, 더욱이 타인에 대한 권한은 더욱 없습니다. 라스콜니코프의 형벌, 즉 그가 겪는 전반적인 고통은 그의 분열된 인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늙은 전당포 주인을 살해한 것은 그의 한 면모였지만, 그 살인에 대한 대가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인간적인 면모입니다.
포르피리의 역할: 지성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
라스콜니코프의 성격이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고, 소냐와 스비드리가일로프라는 두 인물이 그의 양면적인 모습을 대변하는 가운데,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은 라스콜니코프를 다시 온전한 한 인간으로 되돌리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두 명의 구원자적 인물이 필요합니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 성격의 한 측면을 대표하는 인물이므로, 그 측면을 구원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의 인간적인 면모를 구원하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고통을 통해 라스콜니코프는 인간애의 중요성, 즉 인간은 다른 인간의 생명을 빨아먹는 '이'나 기생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다른 구원자적 인물은 포르피리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성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지식인입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에게서 이론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무너졌을 때 부끄러워했던 위대한 존재의 잠재력을 봅니다. 포르피리는 그 이론이 허술하지만 라스콜니코프는 결코 허술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따라서 그의 목적은 라스콜니코프에게 이론의 허술함과 자신 안에 항상 존재하는 잠재력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포르피리가 깨달은 것은 어떤 아이디어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고안되었다면 인간적인 아이디어여야 하고 인간적인 사람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에게 그 아이디어가 허술한 이유는 인류의 상당 부분을 허술하다고 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합니다. 이는 지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지성은 반드시 인간성과 결합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성 회복: 소냐를 통해 본 세상의 아름다움
소설 초반의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와 스비드리가일로프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표현되는 이중적인 인격을 지닌 인물입니다. 문제는 이 인격을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임무는 소냐와 포르피리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은 삶의 인간적인 측면과 지적인 측면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인류 전체의 발전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소냐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수동적인 인물로서, 그녀의 단순한 존재만으로도 라스콜니코프의 행동에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소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고통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너무나 잔혹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발전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00명이 있다면 98명은 악한 면을 지니지만, 2명은 선한 면을 지닙니다. 그 2명의 인물로 인하여 세상은 발전하고 심지어 아름다워지기까지 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진화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이 온통 악함뿐이라면 세상은 없어질 것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처럼, 처음에는 인생이 무엇이 아름다운가라며 염세주의적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라스콜니코프처럼 그 잔혹한 현실을 파괴하기 위해 되는대로 살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되는대로 살아도 되는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권한은 오로지 자연에게만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냐는 바보스럽지만 100명 중 2명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수동성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라스콜니코프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인간성이 지성보다 우선한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구원은 이론이 아닌 인간적 연대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와 벌'은 범죄와 처벌의 이야기를 넘어 인간 본성의 회복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라스콜니코프의 이중적 인격은 소냐와 포르피리라는 두 구원자를 통해 통합되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성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잔혹해도 소냐 같은 존재들이 있기에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출처]
CliffsNotes - Crime and Punishment Critical Ess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