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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부자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개츠비는 한 여성 때문에 부자가 되었고, 저에게 의미 있는 것은 부유함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제가 추구하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되더군요. 위대한 개츠비는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쫓는 목표의 본질을 묻는 작품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당혹스러웠습니다. 도대체 왜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건지, 이 책이 왜 이렇게 유명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읽으면서 피츠제럴드가 그리스 비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천재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비튼 현대적 비극의 탄생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우리보다 위대한 인물이 파멸로 가는 것이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고 했습니다. 오이디푸스 같은 영웅이 잔혹한 운명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을 보며 우리는 숙연해집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의 불행은 그리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지만, 위대한 존재의 추락은 다릅니다.
피츠제럴드는 이 구도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개츠비는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이지만 그리스 비극의 영웅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인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목표로 삼은 존재, 즉 데이지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속물적인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는 성스러운 여성으로 천국의 열쇠를 쥔 존재였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한 남성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죠. 하지만 데이지는 다릅니다. 소설 속 한 문장이 이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지요. 짤랑거리는 돈소리, 심벌즈의 노래 같은 돈소리."
제가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소름이 돋았습니다. 개츠비가 평생 추구한 영원한 사랑은 결국 돈의 목소리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비극이 아닐까요? 고전적 영웅의 희생은 가치가 있었지만, 개츠비의 사랑과 위대성은 허무하고 고독하기 그지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은 1920년대 미국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엄청난 호황을 누렸습니다.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군수물자를 공급하며 제조업이 발달했고, 모두가 부자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호황이 영원할 거라 믿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금주법 시대였습니다. 법으로 술을 금지했지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술이 소비됐습니다. 마피아들이 음지에서 밀주를 만들어 팔며 세력을 키웠고, 개츠비 역시 이런 방식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가 운영했다는 약국은 알코올을 다루는 곳으로 술을 불법 유통하는 통로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개츠비가 모든 것을 걸었던 목표가 과연 가치 있는 것이었을까요?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으로 나뉩니다. 제가 추구하는 부유함도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풀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고귀해집니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모든 것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대중의 시선에서 그녀가 가치 없어 보여도 말입니다. 이는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반성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의미를 두고 있는 것, 우리가 쫓고 있는 것이 데이지처럼 실제로는 가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츠비는 데이지 집 쪽의 초록색 불빛을 향해 항상 손을 뻗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1920년대 우리 시대의 거울
1920년대의 흥청망청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1929년 대공황이 찾아왔고 1939년에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호황은 환상이었습니다.
제가 삶에서 의미를 두는 것은 건강, 행복, 부유함입니다. 어쩌면 행복 속에 건강과 부유함이 포함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개츠비를 읽으며 깨달았습니다. 의미 없음에서 의미 있음으로 자각이 일어난다는 것을요. 설령 의미 없는 일을 하다가도 돌연 깨닫는 지점이 있고, 그러면 재빨리 행동을 바꿀 수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카뮈의 시지프처럼 무거운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는 과정 자체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목표에 닿았을 때 바위는 다시 떨어지고 다시 반복됩니다. 하지만 그 의지 자체가 인간의 위대성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쫓는 초록 불빛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정말 가치 있는 것인가요? 하지만 동시에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위대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