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는 1960년에 출간되어 반세기가 넘도록 사랑받는 고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책은 단순히 '오래된 명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 거울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이 책 제목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읽지 못하고 미뤄왔습니다. 이번에 서평을 접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길거리에서 유색인종을 마주칠 때 무의식 중에 피하려 했던 그 순간들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앵무새 죽이기'였다는 것을요.

차별의 일상성, 우리 안의 편견
일반적으로 인종차별은 과거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차별은 훨씬 더 미묘하고 일상적인 형태로 존재합니다.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 미국 남부 앨라배마의 작은 마을 메이컴을 배경으로 합니다. 어린 소녀 스카우트 핀치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성장소설(bildungsroman)과 법정소설을 결합한 독특한 형식을 취합니다. 여기서 성장소설이란 주인공이 경험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린 문학 장르를 의미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차별의 가해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23명이 모인 한국사 강의에서 백인 한 명과 흑인 한 명이 있었는데, 제 마음속에서는 "왜 이질적인 사람이 한국 사회에 대해 강의하는 곳에 와있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백인을 마주칠 때는 친절하게 응대하면서, 흑인을 마주칠 때는 무의식 중에 피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출처: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 내 외국인에 대한 암묵적 편견 지수는 OECD 평균보다 높게 나타났습니다).
작품 속 애티커스 핀치는 변호사입니다. 그는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하기로 결정합니다. 인종차별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이는 배신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애티커스의 아이들조차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애티커스는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모든 변호사들은 그의 생애 중 한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공판이 한 가지는 있는 거란다."
정의의 역설, 법정이라는 무대
법정은 정의가 실현되는 공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톰 로빈슨의 재판은 법정 드라마처럼 박진감 넘치게 진행됩니다. 애티커스는 톰을 고소한 마옐라 유웰과 그녀의 아버지 밥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명백히 입증합니다. 증거는 분명했습니다. 마옐라 얼굴의 상처는 왼손잡이인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고, 톰은 왼팔을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백인으로만 구성된 배심원단(jury)은 그를 유죄로 판결합니다. 여기서 배심원단이란 시민들로 구성되어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당시에는 백인 남성만이 배심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하퍼 리는 "정의란 승소가 아니라,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태도"임을 보여줍니다.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상적인 변호사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위협을 무릅쓰고 약자를 변호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바로 이런 작품이 세상을 조금씩 바로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티커스는 법정에서 말합니다. "이 나라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 한 곳이 있습니다. 가난뱅이와 록펠러를, 백치와 아인슈타인을, 무식쟁이와 대학총장을 동등하게 하는 인류의 공공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은 바로 이 법정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법정은 오히려 편견이 가장 교묘하게 작동하는 장소였습니다.
제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언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동남아 계열 아이가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 마음속에서도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좁은 세계관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성장과 깨달음, 아이의 눈으로 본 진실
일반적으로 어른들이 세상을 더 정확히 본다고 생각하지만, 제 경험상 오히려 아이들의 시선이 더 본질을 꿰뚫을 때가 많습니다.
스카우트 핀치는 순수한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봅니다. 아이는 이미 인종으로 차별과 배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법을 알기엔 아직 어린아이가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묵묵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회와 법정과 판사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작품의 제목인 '앵무새'는 무해한 존재의 상징입니다. 애티커스는 아이들에게 앵무새를 해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불의는 언제나 가장 약한 존재를 희생시킨다는 비극적 진리입니다. 톰 로빈슨은 무고한 앵무새였고, 고립되어 살던 부 래들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 래들리는 작품 말미에서 아이들을 구함으로써, 사회가 배척한 존재가 진정한 인간애를 실천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죄판결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개하는 아이들에게 애티커스는 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전에도 그래 왔고, 오늘 밤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게다. 그저 아이들만이 눈물을 흘리게 되겠지."
현대 사회에서도 차별은 계속됩니다. 나이, 학력, 성별, 지역 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존재합니다. 미세한 차별의 원인은 인종처럼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기에 더욱 교묘하고 사악하게 작용합니다(출처: 국가인권위원회의 2024년 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3%가 최근 1년 내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습니다).
왜 인간은 서로 다른 종을 배척하는 걸까요? 이것이 생존과 관련 있는 것일까요? 한국 모델들이 유럽에서 한때 배척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차별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SNS에서 넘쳐나는 증오와 미움, 편향되고 왜곡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짜뉴스, 불의와 부정 앞에서 점점 무력해지는 군중들의 모습은 『앵무새 죽이기』가 묘사하는 편견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줍니다.
과연 이 세상에 정의로운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돌아갑니다. 이런 책이 세상을 바로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알을 깨고 나오려 합니다. 세상에 가득한 편견과 불공정을 조금이라도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 양심을 가진 인간 사회라면 말입니다. 겉으로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제 모습을 반성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고한 앵무새"를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성찰을 가능하게 합니다.
참고: https://www.the-reader.or.kr/fo/month/classic/detail?mgbiId=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