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1부에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의 정교한 시스템과 그 안에 숨겨진 통제의 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설계된 사회, 고통과 슬픔이 거세된 그 유토피아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이제 2부에서는 그 견고한 시스템의 벽을 뚫고 나오는 인간 본연의 이기심과, 우리가 왜 기어이 '괴로워할 권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깊고 솔직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이전 포스팅에서 다뤘던 『물의 아이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굴뚝 그을음을 씻어내는 도덕적 정화를 넘어, 여기서는 아예 '그을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도록 인간의 뇌를 세척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정제된 행복이 아니라, 때로는 이기적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나만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1. 소마(Soma)와 인간의 본능: 고통을 거부할 권리에 대하여

작품 속에서 가장 상징적이고도 공포스러운 장치는 '소마'라는 약물입니다. 슬픔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면 사람들은 소마 한 알을 먹고 즉각적인 환상 속으로 도피합니다. 갈등이 생길 일이 없으니 사회는 평온합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이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그 욕망이 생존과 직결되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그 욕망이 꺾였을 때 느끼는 좌절과 고통 또한 인간 본연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입니다.
소마는 인간의 생존 본능과 자아 성찰의 기회를 통째로 빼앗아버린 독약과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삶 속에도 소마와 닮은 것들이 참 많습니다. 끝없이 쏟아지는 자극적인 영상들, 타인의 시선에 맞춘 가짜 일상들 속에 파묻혀 정작 나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잊고 살 때가 많으니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이기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그 욕망이 부딪히고 깨지며 겪는 고통은 나라는 존재를 다듬어가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고통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내가 누구인지 알아갈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2. 나 먼저 잘 사는 법: 불행할 자유와 윤동주의 서시
작품 후반부, 야만인 거주지에서 온 '존'은 시스템의 지배자인 무스타파 몬드 앞에서 외칩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겠소!" 그는 늙을 권리, 질병에 걸릴 권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권리를 주장합니다. 저는 이 처절한 외침을 읽으며 최근 다시 접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왜 그토록 부끄러워했을까? 사실 짜증이 날 정도로 그는 자신의 양심을 부르짖으며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그냥 눈 감고 살아가도 아무도 삿대질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못된 구석이 있고, 그 괴로움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어야 도전이 의미를 갖고, 상처받을 가능성이 있어야 사랑도 깊어지는 법입니다. 저는 숭고한 희생이나 거창한 인류애를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선택한 불행을 온전히 감당하며 나 먼저 잘 사는 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투쟁이라고 믿습니다. 울타리에 갇힌 편안한 동물이 되기보다, 괴로워함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저 역시 윤동주 시인처럼 기꺼이 괴로워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3. 이기적 본능의 긍정: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지 않는 길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소수의 선한 사람들에 끼지 못하고, 여전히 제 욕망과 생존에 몰두하며 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물이나 최면에 기대어 가짜 행복을 연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흘리는 땀과 눈물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이 정직한 나의 삶이라면 저는 기꺼이 그 길을 걷겠습니다. 숭고한 성자가 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내가 머문 자리가 타인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내 삶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인생입니다.
청소년들에게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행복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습니다.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압박보다는,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이기적인 내 모습까지도 끌어안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나답게 살자"라고 말해주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한 교육입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고 나의 못난 부분까지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시스템의 부품이 아닌 한 명의 독립된 인간으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편리함을 이유로 판단을 미루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나만의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헉슬리가 경고한 미래를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4. 맺음말: 설계되지 않은 나만의 길을 걷는다는 것
『멋진 신세계』 2부작을 마무리하며 제 마음속에 새겨진 이기심과 불완전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안도했습니다. 내가 시스템에 의해 완벽하게 개조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 먼저 잘 사는 것, 그리고 남에게 최소한 피해를 주지 않는 것. 어쩌면 이 단순한 상식을 지키는 것이 숭고한 희생보다 더 어려운 황금률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앞으로도 거창한 이타주의를 흉내 내기보다, 제 몫의 삶을 정직하게 꾸려가며 주변에 무해한 존재로 남기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제가 쓴 이 솔직하고 투박한 기록들이, 도덕적 압박에 지친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마음 편히 숨 쉴 수 있는 작은 숨구멍이 되기를 바랍니다. 긴 시간 저의 개인적인 고뇌를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다시 저만의 속도로 돌아가,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평범한 일상을 성실히 채워나가겠습니다. 여러분의 오늘 하루도 복잡한 그을음 없이 맑고 명료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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