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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경청, 비폭력, 생태적 공존)

by dalseong50 2026.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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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소통하는 힘이 있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참 신기합니다.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둘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휴 로프팅의 고전 '둘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을 통해 생명 존중과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분석합니다.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상징하는 '경청의 철학'과 힘이 아닌 지혜로 갈등을 해결하는 비폭력주의적 가치를 탐구합니다. 현대 사회의 생태계 보호와 공존의 메시지를 담은 이 깊이 있는 비평을 통해 둘리틀 선생이 전하는 따뜻한 울림을 만나보세요.

둘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 책 표지 사진
둘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 책 표지 사진

1.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경청의 철학: 소통의 본질을 묻다

둘리틀 선생은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진정한 경청자'입니다. 경청하면 또 생각나는 소설이 있습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입니다.  모모는 이 책의 작은 주인공입니다. 고아에 작은 체구는 겉으로 보기에 볼품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아이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모모에게는 경청하는 능력이 아주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의 주장만 하는 시대에 타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그 자체로 기쁨이 되고, 당연하게 그를 좋아하게 됩니다. 당장 저의 경우만 하더라도 진심으로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무척 좋아하게 되겠지요. 그가 동물의 언어를 배운다는 설정은 단순히 신기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틀을 깨는 **'소통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흔히 소통을 '자신의 의견을 잘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둘리틀 선생은 **'듣는 것이야말로 소통의 시작'**임을 몸소 보여줍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갈등을 겪는 수많은 관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우리가 타인의 언어(혹은 입장)를 배우려 노력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둘리틀 선생의 겸손한 태도는 소통의 본질적 의미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듭니다. 경청은 동서양 고전에서 매우 강조됩니다. 

2. 힘이 아닌 지혜로 푸는 갈등: 비폭력주의의 승리

작품 속 '투우 경기' 에피소드는 둘리틀 선생의 평화주의적 신념이 가장 빛나는 지점입니다. 그는 잔인한 투우 경기에 반대하며 소들과 싸우는 대신, 소들을 설득하고 기발한 지혜를 발휘하여 투우를 평화적인 축제로 바꿉니다. 이는 무력이나 강압이 아닌, 이해와 협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최근 뉴스에 투계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투우경기든 투계경기든 동물들을 억지로 싸움을 시키고, 그것을 오락거리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성(Intelligence)'이 '무력(Force)'보다 강력하다는 고전적 가치를 발견합니다. 둘리틀 선생의 방식은 갈등을 해결할 때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폭력적 해결 방식은 오늘날 국제 사회의 분쟁이나 조직 내 갈등 상황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추구해야 할 성숙한 민주주의적 가치라고 분석됩니다. 인도의 민족주의자 간디가 떠오릅니다. 간디는 비폭력으로 그 일생을 살았습니다.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 그 시대 한 복판에 서 있었던 간디는 거대한 영국을 대상으로 부드러운 저항을 펼칩니다. 결코 폭력을 폭력으로 대면하지 않은 간디의 태도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예수 또한 누군가 너의 오른뺨을 때리거든 너의 왼뺨마저 내놓아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평화를 사랑하는 둘리틀 선생이 좋습니다. 

3. 유리 달팽이와 거대 생태계: 생태적 공존의 평등한 가치

여행의 끝에서 만난 신비로운 존재 '유리 달팽이'와 정착한 섬에서의 경험은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왜 자꾸 현대인들은 이 사실을 망각할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연의 일부가 인간일 뿐인데, 인간은 자연에 맞서려고 합니다.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똑똑한 인간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저부터 인간의 오만함을 버리겠습니다. 둘리틀 선생은 자신이 구한 사람들에게 왕으로 추대받지만, 결국 그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연구와 진료의 길로 돌아갑니다. 이는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우선시하는 그의 고결한 인격을 보여줍니다. 슈바이처 선생도 생명의 경외심을 말한 인물입니다. 슈바이처는 그가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버리고 오지 아프리카로 가서 생명을 살립니다. 둘리틀 선생의 행보는 현대의 **'생태 중심주의(Eco-centrism)'**와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보지 않고, 달팽이나 원숭이와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 감수성을 일깨워줍니다. 대등한 위치에 선 둘리틀 선생이 제삼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더 위대해 보입니다. 강자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람입니다.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가 심각한 오늘날, **"모든 생명은 각자의 언어와 권리를 가진다"**는 둘리틀 선생의 외침은 단순한 동화를 넘어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철학으로 재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나무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고 오로지 태양과 흙과 공기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에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은 고군분투해서 무엇인가를 먹어야 살지만, 나무는 식물들은 그런 하찮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귀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나무가 더 큰 생명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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