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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재해석 (작가의 거리, 인물의 한계, 독자의 연루)

by dalseong50 2026.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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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재해석 (작가의 거리, 인물의 한계, 독자의 연루)
걸리버 여행기 재해석 (작가의 거리, 인물의 한계, 독자의 연루)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읽을 때, 우리는 종종 걸리버라는 인물과 작가 스위프트를 혼동합니다. 하지만 걸리버는 스위프트의 대변인이 아니라, 풍자를 위해 고안된 등장인물입니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가와 인물 사이의 거리, 걸리버라는 인물이 지닌 구조적 한계, 그리고 독자가 풍자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이 글에서는 걸리버를 단순한 어리석은 인물로 규정하는 전통적 해석을 넘어, 보다 복합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재조명합니다.

작가의 거리: 스위프트는 정말 안전한가

조너선 스위프트와 레뮤엘 걸리버를 동일시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스위프트는 걸리버를 가면이나 대변인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걸리버는 순진한 눈빛의 화자로 설정되었습니다. 초기 비평가들, 예를 들어 새커리 같은 인물들은 여행기 4권을 읽고 스위프트가 "말도 더럽고 생각도 더럽고 격렬하고 외설적인" 책을 썼다며 그를 "야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걸리버가 야후족을 비난하고 후이넘족을 숭배하는 것이 우화적인 모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걸리버 자신의 견해라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스위프트는 영국 문학에서 가장 복잡한 인물 중 하나로, 단순하고 순진한 걸리버와는 정반대입니다. 걸리버가 릴리푸트인들 사이에 있을 때는 비평가들도 스위프트와 걸리버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위프트가 걸리버를 야후족과 후이넘족이라는 극단적인 두 종족 사이에 배치하자, 풍자는 더 이상 시사성을 잃었고 모든 인류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은 스위프트가 아니라 걸리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스위프트는 정말 항상 통제자이자 아이러니스트로서 안전한 거리를 유지했을까요? 전통적 해석은 스위프트를 도덕적 판단자로 남겨두지만, 스위프트의 풍자는 종종 자기 자신까지 감염시키는 파괴성을 지닙니다. 걸리버의 극단적 인간 혐오가 스위프트 자신의 불신과 분노를 과도하게 증폭한 결과라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스위프트의 환멸은 분노로 바뀌어 풍자를 쓰게 만들었지만, 그 분노가 걸리버의 혐오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작가와 인물 사이의 거리 설정이 지나치게 안정적으로 가정되면, 스위프트의 불안정성과 자기모순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게 됩니다.

인물의 한계: 걸리버는 단지 어리석기만 한가

걸리버는 작품 말미에서 완전히 혼란에 빠집니다. 그는 비인간적인 이상을 추구했고, 인간 이하의 존재인 야후족을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여겨 거부했습니다. 걸리버는 제대로 바라보면 『여행기』가 끝날 무렵에는 어리석은 인물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가족보다 말과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성을 숭배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성이 거의 결여되어 있습니다. 걸리버의 순진함과 단순함이 그의 몰락을 초래했고, 그는 인간이 야후족이나 후이 넘 족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걸리버를 '어리석은 인물'로만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단순화입니다. 걸리버는 단지 어리석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당대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적 주체가 극단으로 밀려날 때 어떤 파국을 맞는지 보여주는 실험적 인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즉, 그의 한계는 개인적 결함이라기보다 시대적 인간형의 구조적 한계일 수 있습니다. 걸리버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보고하지만, 종종 자신의 관찰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기자로서 정직하며,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중하지도 않고 상상력이 풍부하지도 않아서 스스로 기발한 모험을 숨기거나 끼워 넣을 만큼 똑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걸리버는 호기심이 많고, 그 잘 속는 성향 때문에 온갖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만약 그가 스위프트처럼 영리했다면 모험은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프로브딩나그인들을 너무 화나게 해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걸리버는 특정한 독자층을 상상했지만, 스위프트는 전혀 다른 독자층을 위해 작품을 썼습니다. 걸리버의 시각을 마치 유원지에서나 볼 수 있는, 당혹스럽고 충격적인 거울상처럼 보여줌으로써, 스위프트는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고, 확대하고, 축소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풍자의 이유입니다.

독자의 연루: 우리는 정말 우월한 관찰자인가

전통적 해석은 독자가 걸리버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그를 관찰하며 아이러니를 간파할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합니다. 걸리버는 릴리푸트인들의 위대함에 감탄하지만,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서술 너머를 들여다보게 하여 왜소한 릴리푸트인들과 그들의 거창한 생각 사이의 아이러니를 깨닫게 합니다. 걸리버는 자신의 모험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지만, 스위프트는 독자를 더 멀리 끌어당겨 걸리버 자신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걸리버를 좋아하면서도 그에게 우월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위프트의 풍자는 독자를 안전한 관망자로 두지 않는 장르입니다. 독자 역시 걸리버처럼 특정 순간에는 후이넘의 이상에 매혹되고, 야후를 경멸하며, 나중에야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스위프트가 걸리버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어조는 작가와 주인공을 구분 짓는 핵심 요소입니다. 걸리버는 마치 우리가 그처럼 잘 속는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를 전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스위프트는 걸리버가 후이흐늠족의 이상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은근히 조롱하고, 서서히 그 이상이 생명력이 전혀 없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이런 식으로 스위프트는 걸리버가 비판적 사고와 추론 능력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걸리버는 마치 수학 방정식처럼 생명력이 없는 무언가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말과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걸리버에게는 매혹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전혀 흥미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걸리버의 매혹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깨달음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독자의 풍자 속 연루 가능성, 즉 "나 역시 걸리버일 수 있다"는 위험을 충분히 문제화하지 못하면, 풍자는 도전이 아니라 교훈으로만 정리되고 맙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걸리버의 어리석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와 인물 사이의 불안정한 거리, 경험주의 시대 인간형의 구조적 한계, 그리고 독자 스스로의 판단 착오 가능성까지 함께 성찰해야 합니다. 걸리버는 유럽인이라는 자부심에서 모든 인간에 대한 혐오감으로 완전히 돌아섰지만, 우리 역시 극단 사이에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스위프트의 풍자가 진정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은, 우리가 걸리버를 비웃다가 문득 거울을 보는 순간입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cliffsnotes.com/literature/g/gullivers-travels/critical-essays/gulliver-as-a-dramatis-pers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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